“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가곡 선구자의 노랫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경인 두만강 상류에 흐르는 해란강은 백두산에서도 동쪽으로 치우친 강이다. 해란강 일대는 지금, 남의 나라 남의 땅이 되었지만 해란강은 우리 한민족 역사의 시작점에 가깝다. 참고로 백두산을 기점으로 서쪽으로 흐르는 강은 압록강이고 동해로 흐르는 강은 두만강이다,
역사에 따르면 해란강 북동쪽에서 북부여가 일어났고, 그 북부여에서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이 세력을 이끌고 남하해 고구려를 건국했다. 고구려의 수도 졸본성은 해란강이 아닌 백두산 서쪽 압록강에 가까운 낮은 구릉이었다고 한다. 지도상에 있는 거리로만 보면 서울과 부산 정도의 거리만큼 멀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고구려가 번성하면서 북부여는 고구려의 땅이 되고 해란강은 다시 한민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역사는 가혹하게도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서기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무너진 고구려의 많은 유민은 신라보다는 당에 유입됐고, 신라와 당에 유입되지 않은 고구려의 백성들은 만주 전역으로 흩어졌다. 그들 중 일부는 오늘날의 터키까지 진출했다. 세상은 그들을 투르크(돌궐)라고 부르며 튀르키예는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말한다.
또 다른 고구려의 백성들은 여진족으로 동화됐다. 그중 해란강 일대에 자리 잡은 여진을 해서 여진이라고 한다. 북만주, 그중에서도 해란강 일대에 자리 잡은 해서여진이 우리의 역사에 재등장하는 시기는 조선시대이다.
조선에 앞서 해란강 일대에서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보유한 발해가 있었지만, 발해에 대한 기록이 우리나라와 중국이 주장하는 바가 크게 다르다. 중국은 발해가 당나라의 한 세력이 북쪽으로 이주해 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하지만 우리의 역사에서는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이며, 발해의 민족 구성원이 여진과 고구려 등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삼한의 대단한 장수 이성계가 만주 일대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고 조선을 건국한 지 200년 만에 해란강 일대에 있던 해서여진은 선조 시대에 들어서면서 크게 난을 일으킨다. 바로 ‘니탕개’의 난이다. 이 니탕개의 난으로 유명한 장수가 신립과 이순신이다.
이순신 장군의 조선 만호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 ‘천군’에 나오는 여진족이 바로 니탕개의 해서여진족이다. 난은 신립 장군에 의해 모두 정리가 됐다. 이들을 정리하지 못했다면 동시대 요동의 건주여진에서 일어난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바로 세우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건주여진과 척을 세우던 해서여진의 주력 중 일부를 조선이 정리하는 바람에 청나라의 시조 ‘누루하치’가 만주를 통일하고 금나라를 세우는 데 보탬이 됐다. 후에 조선의 인조는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이후 청의 만주 봉쇄 정책에 숨죽어 있던 해란강이 다시 등장하는 시기는 일제강점기이다. 북만주를 건설하고 제국주의의 힘을 과시하던 일본의 수장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곳이 발해 수도의 인근이었던 하얼빈이다. 두만강과 해란강에서도 북쪽으로 한참 위에 있던 북만주의 도시 하얼빈에 숨어들기 위해 열사들이 넘나들었던 강이 해란강이다.
우리 민족의 생존과 직결된 치열한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지만, 지금은 남의 나라 땅이 되어버린 해란강과 블라디보스톡 그리고 하얼빈에서 동명성왕과 신립 장군의 부릅뜬 눈은 한민족의 기개가 역사 이후에도 살아 버티고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