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차 대전 이후, 전쟁에 패배한 독일경제는 상당히 힘들었다. 천문학적인 전쟁배상금과 함께 영토까지 일부 빼앗긴 독일은 먹을 것조차 구하기 힘든 그런 시절을 보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아돌프 히틀러다. 히틀러는 더 이상 전쟁배상금을 내지 않겠다는 선언과 함께 배고픈 독일 국민의 증오를 유대인에게 돌렸다. 그리고 자국민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자존감을 살렸지만, 그 결과는 끔찍한 학살로 이어지며, 오늘날까지도 유대인 집단학살에 대한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일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 참상에 대한 화풀이를 조선인에게 돌려 대학살이 자행됐다. 이후 일본에 의한 난징 대학살 사건도 있었다. 원인은 다르지만, 참상의 배후에는 근거 없는 혐오와 배척이 자리 잡고 있다. 근대에 들러서는 세르비아에서 일어난 인종청소와 이스라엘에 의한 제노사이드가 있었다. 이런 일련의 참상을 주도한 세력은 모두 집권에 성공했던 극우파들이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최근 한국에서도 극우파에 의한 이런 시도가 종종 보고되고 있다. 사회와 정치가 혼란한 틈을 비집고 들어서고 있는 한국의 극우파는 중국인을 혐오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사실상 중국인의 한국 정치참여는 매우 어렵다.
“야당 국회의원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선거관리위원회의 부정선거를 밝히기 위해서”라며 계엄을 선포하고, 포고령을 통해 국회는 물론 지방의회의 정치활동까지 중지 명령을 내리고 언론, 출판의 활동까지 중단하라 했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은 어처구니없게도 일부 의사들에게는 처단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며 계엄 포고문을 발표했다. 다행히 국민의 도움과 국회의원들의 신속한 판단으로 계엄은 해제됐다. 만일 당시에 국민 다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계엄령은 해제되지 못하고 실행됐을 것이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지난 12월 3일 밤은 아찔한 순간이었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계엄이 실행됐다면 서울 시내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고, 정치활동을 막으려는 검문 검색이 일상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군인들을 피해 달아나는 정치인들과 그들을 체포하려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며, 포고령에 따라 하루아침에 활동이 중지된 언론사들은 매일 계엄사에 의한 검열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항의하는 사람들은 계엄군에 의해 체포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런 불상사가 국민들에 의해 와해하긴
현직 대통령을 구속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한국이 해냈다. 윤석열 대통령은 19일 일요일 새벽 전격 구속이 결정됐다. 이에 반발하는 극렬지지자들의 난동에 가까운 법원 습격이 있었으나 다행히도 사상자는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치권은 난동을 부린 사람들에 대해 한쪽은 경찰의 과잉 대응이라 말하고, 또 다른 한쪽은 난동을 부린 사람들에 대해 엄하게 벌하고, 선동을 한 사람은 물론 배후자도 밝혀야 한다는 입장이다. 각 정당의 입장과는 별개로 윤석열 대통령의 지도체제와 역사 인식에는 문제가 있었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의 공훈은 당시의 현실을 직시해 평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이념잣대로 평가함으로써 국논이 분열될 정도의 논란을 야기했다. 그리고 한국의 사법 체계를 정면 부정함으로써 반 사회주적 인물임을 스스로 드러냈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이에 야당은 연일 여당과 대통령을 향해 말의 포문을 열고 있다. 그러나 야당의 행태도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대통령의 계엄선포와 일련의 행태는 반드시 처벌해야 하고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야당이 이것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이용해 선거 승리만을 위해 악용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주장을 쉽게
선조 25년 4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정벌을 명했다. 이에 따라 왜군 20만 명이 7년에 걸쳐 한반도에 투사된다. 상비군 전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조선은 28일 만에 한성을 빼앗기고 평양성으로 후퇴한다. 한술 더 떠 선조는 의주로 도망을 친다. 이때 파업 중이었던 명나라의 ‘만력제’는 조선에 파병을 결정하고 군량미 20만 석을 보낸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왜군을 겨우겨우 몰아내고 조선은 어렵게 나라를 구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조선군이나 명나라 군이 나라를 구했다기보다는 침략받은 조선의 백성들이 스스로 나라를 구했다고 보는 것이 옳았지만 당시 지배계층의 생각은 달랐다. 명나라의 도움으로 나라를 구했다고 생각했다. 이때 등장하는 말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이다. 한 마디로 거의 망할 뻔했으나 구해줘서 살았다는 뜻이다. 이후 명나라는 조선의 지배계층에게 재조지은의 나라가 된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에 만주에 건주여진의 후금이 들어서고 조선은 후금과 명의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재조지은 나라 명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장수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고, 부원수를 김경서(金景瑞)로 임명해 포수 3500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이 사법 시스템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으로 혼란을 조장하더니 경기도에서는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연초부터 언론사 차별을 조장하는 기자회견을 강행하며 소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 지사의 눈살 찌푸리는 언론사 차별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지난해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도 어느 인터넷 언론사의 기자가 손을 꾸준히 들며 질문의 기회를 얻고자 했으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대형 언론사 기자의 질의에만 답을 주고받았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이 자리에서 어처구니 없지만, 김 지사는 영화 ‘다음 소희’를 같이 봤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소외당하는 이들의 마음을 챙기는 그런 도지사인 양 이야기했다. 그런데 정작 그 자리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가장 소외당하는 이들은 인터넷 언론 소속 기자들이었다. 질문조차 받아주지 않는 인터넷 언론 기자들의 뒷모습은 씁쓸 그 자체였다. 사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인터넷 언론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몇몇 대형 인터넷 언론사를 제외하고 인터넷 언론사의 열악한 구조는 익히 아는 사실이다. 언론사 운영 이외에 별도의 수익구조가 없는 언론사의 경우 관에서 공급하는 광고에 크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것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식의 계엄령이 지난해 12월 3일에 있었다. 농담 같은 계엄령 발동은 현실이었고 국회는 즉시 입법부의 권한을 발동해 계엄령 해제를 의결했다. 어이없는 계엄령이라고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모두가 가슴 철렁했던 순간이었다. 다행히 북한은 조용했고, 인명 손실은 없었다. 지난 과거의 한국 역사를 돌아볼 때 군 통수권자의 계엄은 모두 피를 불러온 참사가 있었기 때문인지 한국에서의 계엄은 바로 독재와 이에 저항하는 피 흘리는 시민이 연상된다. 그런 이유로 윤석열의 계엄은 지탄받아 마땅하고, 계엄 실행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한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그래서 국회는 대통령의 탄핵을 의결했고,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의결에 따른 대통령 탄핵에 대한 법적 검토에 들었다. 이와는 별개로 경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는 대통령의 행위가 위법한지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수사의 대상이 된 대통령이 경찰이나 공수처의 소환에 응하지 않는 파렴치한 일이 반복되면서 대통령이라는 직위가 가지고 있는 무게가 가소로워지고 있다. 법원의 영장을 받아 대통령의 신병을 인도받아 수사하겠다는 것은 법적 절차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연일 이를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그리고 을사년 새해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2024년은 시작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올림픽은 신기록을 작성했으며, 대통령의 계엄과 탄핵 그리고 사고까지 기쁨과 분노 그리고 슬픔이 교차하던 한 해를 마감하며 새해를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을사년 새해는 하시는 모든 일들이 실타래 풀어지듯 잘 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또한 꿈꾸던 것들이 소망하신 대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경인뷰는 언제나 앞서가는 언론을 다짐하며 시작했듯, 을사년에도 쉼 없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주목받는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의 일상을 더 많이 기록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뉴스를 보는 즐거움 경인뷰 후원계좌 농협 351-0219-6589-93 전경만
밀레니엄 시대, 세계 속의 한국이 주목받고 있는 시점에 터진 윤석열 정권에 의한 한국의 계엄령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한국을 주목하고 있는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상상 불가능한,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한국 민주주의 말살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가진 사람이 자행했다. 지난 12월 3일 계엄군 사령관 명의로 작성된 포고문을 보면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2.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4.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한다 .5.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6.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 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 9조(계엄사령관 특별조치권)에 의하여 영장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나이가 들어 선거권을 가지게 된 이후 세 번의 대통령 탄핵을 경험했다. 첫 번째는 노무현 대통령이고 두 번째는 박근혜 그리고 이번은 윤석열 대통령이다. 좌우 이념을 떠나서 성인의 시점에서 보는 세 번째 대통령 탄핵은 정의라는 단어보다 그저 한국인이 참 역동적이로구나 하는 느낌이 먼저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87년 헌법조차 수많은 국민이 거리에서 흘린 피의 대가로 만들어진 헌법이었고, 그 87년 헌법안에서 세 명의 대통령이 국회로부터 탄핵받았다는 사실은 참 기가 막힌 일이다. 첫 번째 탄핵은 대통령이 선거 중립의 의무를 위반했다는 혐의이었으며 두 번째는 국정 논란, 이번에는 내란 혐의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번째로 탄핵받았던 고)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과는 별개로 지금도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대통령이다. ‘권위주의 청산’과 ‘시대정신’을 강조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명연설은 지금도 디지털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요!”라는 그의 연설을 즐겨보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헌법재판소에 의해 기각됐으며 그다음 해 선거에서 여당은 참패했다. 두 번째로 탄핵당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혐의는 국정농단이다
123 계엄을 고도의 통치 기술이라 말하며, 부정선거 의혹이 여러 건이 있어 군대를 동원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조사하려 했다는 윤석열 현 대통령의 주장은 한 마디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한 광기에 찬 행동이다. 설령 진짜로 부정선거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조사의 주체는 검찰 혹은 경찰의 영역이다. 군대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군대를 동원했다 함은 단순히 힘의 과시이며, 대통령의 직위를 과거 전제주의 국가의 왕으로 착각하는 망상에서 비롯된 일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오래전에 왕권 국가에서 탈피한 민주주의 국가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절차적 민주주의다. 대통령이 무엇을 하던 민주주의 법 제도가 정한 절차에 따라야 하며, 이를 어길 때는 대통령이 아니라 누구라도 법의 잣대에 의해 처벌받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처벌은 불가피하다. 이번 계엄 사태와 관련, 여러 증언을 볼 때 윤석열 대통령은 상당히 많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지 않았다. 계엄과 관련해 군대가 움직일 만한 국가 비상 상황이 아니었으며, 군대가 국회를 포위할 어떠한 명분도 없었다. 또한 군이나 경찰이 국회의원들을 체포할 수 있는
한민족의 해외파병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군이 신라에 쳐들어온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경상도에 파병을 한 것으로 시작해, 고려시대에 송나라 파병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광해군이 집권한 시기에 명나라에 일만 삼천여 명의 조총수들을 파병한 적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었던 광해군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파병하길 거부했으나 당시 집권층이었던 양반들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군사를 파견해 사직을 지켜주었던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파병을 주장했다. 왕권이 강하지 못했던 광해군은 결국 강홍립 장군을 도원수로 삼고 파병을 결정했다. ‘사르후 전투’라고 알려진 이 전쟁에서 명나라 군은 대패하며, 망국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후금이 청으로 이름을 바꿔 불같이 일어났다. ▲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근대사에 오면 한민족의 파병은 더 멀리까지 가게 된다. 6`25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이었던 지난 1964년 9월, 의무대와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1967년 8월까지 4차례에 걸쳐 국군이 베트남에 파견됐다. 대한민국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해병 2여단(청룡부대)의 전투 병력을 보내고, 뒤이어 육군 9사단(백마부대)을 파견했었다. 베트남 파병의 진실은
나라가 어렵다고 조국을 버리는 국민이 전체 국민의 얼마나 될까? 조선에서 박해와 차별을 받았다고 청나라에 붙어서 조선을 침략한 일부 조선인들, 임진왜란 당시에 살기에 팍팍하다고 왜놈과 함께 양반들을 도륙했던 일부 백성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에 편승에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던 사람들 등 역사에서 보면 어려웠던 나라를 배신한 사람들은 상당히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전체 국민의 5% 될까? 그런 사람들이 10%만 넘어가도 나라는 이미 수백 번을 망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조국이 어려울 때 나라를 배반한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다수의 사람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섰기에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망국기에서도 국민은 나라를 지켜냈다. 진짜 어려웠던 일제강점기에는 일반백성들이 일본에 진 빚을 갑 자고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1997년 IMF에는 온 국민이 금을 모아 내다 팔았다. 정말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단한 민족이다. 그런 사람들이 국민으로 있기에 온갖 추잡한 일이 일상이 되는 상황에서도 이 나라가 지금까지 건재한 것이다. ▲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그런데 지금은 정치권의 공방이 일반 국민이 생각하고 있는 선을 넘나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