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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에 백선엽의 자리는 없다.

이념의 다름은 국가의 운영방식에 대한 투쟁
민족과 조국 자체를 배반한 자는 엄단해야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일본과 싸운 사람 중에는 이름이 잘 알려진 분들도 있고,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분들도 많다. 그분들의 모든 이름이 아직까지 다 공개 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지금까지도 친일의 잔재가 우리 현실에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친일의 잔재는 민주주의 수호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누구나 다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는 명분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오류이며 식민 지배를 인정하는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1919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한반도에서는 삼일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확산일로에 있던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던 사람들과 뚜렷한 사상이 없던 사람들을 포함해 모든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조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것이 삼일만세 운동이다.

 

삼일 만세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르고 옥중에서 사망한 사람들도 부지기수 이었다. 그중에 윤형숙 열사는 일본군 헌병의 군도에 의해 한 팔이 잘렸음에도 잘리지 않은 다른 팔로 또 다시 태극기를 들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쳤을 만큼 간절히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런 절절한 외침은 1919년 4월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져 무력으로 나라를 다시 되찾겠다는 우리의 투쟁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아시아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태평양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도 전쟁을 하게 된다.

 

초반 일본의 우세는 대단했다고 하지만 일본이 세운 만주국은 번번이 한국 독립군에 의해 큰 상처를 입었다. 한국 독립군은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이토로 히로부미를 저격하는가 하면, 일본의 심장에서도 대한의 독립을 주장할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일부 세력들은 일본군의 개가 되기를 스스로 자처해 만주국의 군인이 되었던 자도 있었으며, 일본 육사에 투신한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한의 독립을 스스로 부정하며, 민족을 배반하고 대한이라는 조국 자체를 말살 하려는 자들과 한 패가 됐다.

 

세계 이차대전 당시 프랑스도 독일군에 패해 알제리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일과의 투쟁을 이어갔다. 그리고 프랑스 임시정부가 파리 수복 후 제일먼저 착수한 일은 독일이 세운 프랑스의 비시정부 협력자들을 처단하는 일이었다.

 

처단의 주 대상자는 독일이 세운 괴뢰정부에 협력했던 언론인과 교수 그리고 자본가들이었다. 처벌의 이유는 간단했다. “이념의 다름은 나라의 운영방식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민족을 배반하고 조국을 말살하려는 자들에 협력한 자는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지금 한국에서는 일부 세력들이 백선엽이라는 자가 이념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고 국립현충원에 묻힐 자격이 있다고 주장들을 한다. 이념의 전쟁은 조국의 운영방식에 따른 민족적 비극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걷고 있지만 그 이전에 조국자체를 부정한자가 현충원에 묻힐 자격이 있는지는 깊게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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