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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치가는 백성의 안위를 살피고 나쁜 정치가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

정치가의 눈이 어두우면 백성이 고생하는 법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개혁 군주를 뽑으라면 세종대왕과 정조대왕 그리고 많이 쳐주면 중종 정도일 것이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이야 말할 것도 없고, 조선후기를 이끌었던 정조는 대동법을 비롯한 많은 개혁입법을 세워 조선후기의 틀을 만든 임금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한사람 왕으로써 생을 마감하지는 못했지만 진정한 개혁군주인 사람도 있었다. 바로 광해군이다.

 

광해군은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로부터 왕의 사무를 대리하는 분조의 책임을 맡아 사실상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길을 오르며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 광해는 조선의 국본(세자)로서 책무를 다하기 위해 평안도와 함경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았다. 그리고 조선 병영의 현실을 파악하고 현실에 맞는 국방정책을 펼쳤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그럼에도 그가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여러 가지 핑계가 있지만 가장 크게 원인이 된 것은 바로 명나라에 대한 진정한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광해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선조의 장자이었던 임해군과 적자이었던 영창대군을 죽인 것이 흠이 되고, 생모는 아니지만 어머니에 해당하는 인목대비를 가둔 것이 흠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임진왜란 후에 쇠약해진 나라는 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도 그 기운을 다했었다. 그사이 발효한 것이 건주여진의 ‘누루아치’이었다. 건주여진이 쇠망한 명을 침공하자 다급해진 명은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다. 조선은 파병불가를 외치는 광해와 당파를 지은 신하들이 격하게 대립했다. 결국 파병은 결정되었지만 광해는 원정군 장수이었던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대응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강홍립은 건주여진의 기세가 대단하다고 판단해 싸우는 척만 하며 투항을 했다. 그것은 훈련도 되어있지 않았던 조선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조정에 알려지게 되고 파당을 결성한 신하들은 광해의 군대가 돌아오고, 왕권이 강화되면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 판단해 광해를 폐위시키기에 이른다. 광해는 즉위의 과정에서 전쟁을 통해 배운 것이 많았다. 훈련된 군사와 그렇지 못한 군사와의 차이점 그리고 명나라의 부패가 명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반면, 명나라에 ‘제조지은(나라를 구해준 은혜)’을 해야 한다며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이들은 결국 인조를 내세워 자신의 권력을 연장시키는 것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 때문에 수십만의 백성들이 여진족에 끌려가는 병자호란을 자초 했으며 한나라의 국왕이 후금의 황태자 앞에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땅에 박는 삼베구고의 치욕을 당하게 됐다.

 

이런 역사를 다시 한 번 소개하는 것은 광해의 아버지인 선조는 48년 동안의 임기를 마치고 천수를 누렸지만, 광해는 왜 그러하지 못했을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후대가 보기에 광해의 생각과 판단이 좋아 보이기는 했어도 여론을 모으지 못한 것은 광해의 과에 해당한다.

 

또한 선조시대에 살았던 쟁쟁한 인물들은 우리나라 화폐 대부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라는 것도 있다. 이들은 권력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고 광해시대의 정치가들은 백성보다 자신들의 권력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나라가 사단이 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권력보다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있는 정치가는 누구일까?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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